“화재 나면 엘리베이터 타지 마세요”…영국은 왜 피난용 승강기 기준을 강화했나

뉴스 Profile elmoa • 2026-10-30 07:38 • 수정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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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국, 피난용 승강기 검사·시험 표준 BS 8486-10:2026 발표…화재 중 대피 운행의 안전성 검증

한국도 피난용 승강기 제도 운영…설치 기준 넘어 실제 운행·관제체계 점검 필요

[엘모아=편집부] 건물에서 화재경보가 울리면 가장 먼저 듣는 안내 중 하나가 있다. 엘리베이터를 이용하지 말고 비상계단으로 대피하라는 것이다. 엘리베이터가 화재로 멈추거나 승강로를 통해 연기가 유입될 수 있기 때문이다. 이러한 안내는 오랫동안 건물 화재 시 지켜야 할 기본적인 안전수칙으로 자리 잡았다.

그런데 여기에는 한 가지 현실적인 문제가 있다. 휠체어 이용자나 거동이 불편한 노약자, 계단을 내려가기 어려운 사람들은 어떻게 대피해야 할까. 수십 층 높이의 건물에서 계단을 이용할 수 없는 사람에게 엘리베이터를 타지 말라는 안내만으로는 충분한 대피 대책이 될 수 없다.

영국이 이러한 문제에 대응해 피난용 승강기의 안전성을 검증하는 새로운 기술 표준을 발표했다. 영국승강기·에스컬레이터산업협회(LEIA)는 지난 10월 15일 영국표준협회(BSI)의 새로운 표준인 'BS 8486-10:2026'을 소개했다.

이번 표준은 화재 상황에서 이용할 수 있도록 설계된 피난용 승강기가 실제 운행에 들어가기 전 요구되는 안전기능을 갖췄는지 검사하고 시험하는 방법을 규정한다. 기존에 제정된 유럽 승강기 안전표준 BS EN 81-76:2025의 요구사항을 실제 현장에서 검증하는 절차를 마련한 것이다.

이는 일반 엘리베이터를 화재 때 마음대로 이용해도 된다는 뜻이 아니다. 화재 중에도 운행할 수 있도록 특별히 설계된 승강기를 사전에 검증하고, 정해진 피난계획에 따라 사용하도록 하겠다는 접근이다.

 

화재 때 엘리베이터를 이용할 수 있는 조건은 무엇인가

일반 승객용 엘리베이터는 화재 발생 시 특정 층으로 이동한 뒤 운행을 중단하는 방식으로 설계되는 경우가 많다. 화재가 발생한 층에 카가 정지하거나 승강로로 연기가 유입되는 상황을 피하기 위해서다.

반면 피난용 승강기는 상황이 다르다. 화재 상황에서도 일정한 안전조건을 확보할 수 있도록 별도의 보호시설과 운행기능을 갖춘다.

영국의 BS EN 81-76:2025는 장애인 등 계단을 이용하기 어려운 사람들의 대피를 지원하기 위한 승강기 요구사항을 규정한다. 대표적으로 화재와 연기로부터 보호되는 승강장 대기공간, 안전한 전원 공급, 건물의 화재감지설비와 연결되는 제어시스템 등이 중요하다.

화재가 발생하더라도 승강장과 승강로가 안전하게 보호되고, 피난운행에 필요한 전원이 유지되며, 승강기가 위험지역으로 이동하지 않도록 통제할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특히 이번 기준이 주목하는 것은 승강기 자체의 기계적인 안전성뿐 아니라 화재 상황에서 제어시스템이 어떻게 작동하는가 하는 문제다.

엘리베이터가 정상적으로 움직이는 것과 화재 속에서 사람을 안전하게 대피시키는 것은 전혀 다른 문제이기 때문이다.

 

영국은 자동 피난운전까지 검토…엘리베이터가 대피층을 판단한다

BS EN 81-76:2025는 피난용 승강기를 운행하는 방식으로 자동 피난운전, 카 내부 담당자의 조작에 의한 피난운전, 원격 지원 피난운전 등 세 가지 유형을 규정하고 있다.

이 가운데 가장 눈여겨볼 부분은 자동 피난운전이다.

자동 피난운전은 건물의 화재감지·경보설비와 승강기 제어시스템을 연동해 피난이 필요한 층의 호출을 처리하고, 승객을 지정된 피난 출구층으로 이동시키는 방식이다.

일반적인 엘리베이터는 이용자가 원하는 층을 선택해 이동하지만 자동 피난운전에서는 목적이 다르다. 승객을 필요한 층에서 태운 뒤 안전한 출구층으로 운송하는 것이 우선이며, 일반 운행처럼 임의의 층을 자유롭게 선택하는 방식과 구별된다.

화재가 발생한 층과 피난이 필요한 층을 파악하고, 건물의 피난계획에 따라 필요한 호출을 처리하도록 설계하는 것이다.

하지만 자동화가 모든 위험을 해결하지는 못한다. 승강장이나 승강로에 연기가 유입되면 상황이 달라진다.

영국 기준은 이러한 경우 건물의 화재감지시스템이나 관리시스템이 승강기에 피난운행 중지 신호를 전달할 수 있도록 한다. 해당 신호가 전달되면 정해진 절차에 따라 승객이 내릴 수 있도록 조치하고 피난운행을 중단하게 된다.

화재가 났다는 이유만으로 무조건 엘리베이터를 정지시키는 것과, 안전한 범위에서 피난운행을 지원하다가 위험조건이 발생하면 운행을 중단시키는 것은 상당한 차이가 있다.

다만 영국승강기·에스컬레이터산업협회는 원격 지원 피난운전의 경우 통신 보안, 관리자의 교육, 건물 상태 감시 등 복잡한 조건이 필요하다며 적용에 신중해야 한다는 입장을 밝히고 있다.

 

새 표준의 핵심은 '설치'가 아니라 '제대로 작동하는지 확인'

이번에 발표된 BS 8486-10:2026은 피난용 승강기 자체의 성능을 처음부터 새로 규정한 표준이 아니다.

기존 BS EN 81-76:2025가 요구하는 피난 관련 기능이 실제 설치된 승강기에서 제대로 구현됐는지 검사하고 시험하는 방법을 구체화한 것이 핵심이다.

설치업체와 시험 담당자는 정해진 시험 절차에 따라 피난용 승강기의 기능을 점검하고 그 결과를 기록할 수 있다. 이러한 기록은 승강기가 관련 요구사항에 적합하다는 사실을 입증하는 기술문서에도 활용된다.

또한 최초 설치검사뿐 아니라 향후 승강기를 개조하거나 기능을 변경하고 다시 시험하는 과정에서도 참고할 수 있다.

다만 해당 표준만으로 건물 전체의 화재 안전성을 검증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승강장과 승강로의 방화구획, 연기 유입 방지, 비상전원 등의 건축물 관련 조건은 별도의 건축·소방 기준과 함께 검토해야 한다.

이는 승강기 제조사가 피난용 승강기를 제작하는 것만으로 충분하지 않다는 의미다. 건축설계자와 소방설비 업체, 승강기 제조사, 제어반 업체, 건물 관리자가 서로 연계해 하나의 피난시스템을 완성해야 한다.

특히 화재감지설비에서 어떤 신호를 승강기에 전달할 것인지, 특정 층의 호출을 어떻게 처리할 것인지, 피난운행을 언제 중단할 것인지는 실제 운행의 안전성을 좌우하는 중요한 요소다.

 

한국도 피난용 승강기가 있다…일반 승강기와 무엇이 다를까

영국이 피난용 승강기의 시험기준을 구체화하고 있다는 사실은 국내 승강기 업계에도 생각할 거리를 던진다.

한국 역시 피난용 승강기 제도를 이미 운영하고 있다.

「건축법」 제64조 제3항은 고층건축물에 설치하는 승용승강기 가운데 1대 이상을 피난용 승강기로 설치하도록 규정한다. 「건축법 시행령」 제91조와 「건축물의 피난·방화구조 등의 기준에 관한 규칙」 제30조는 피난용 승강기의 승강장, 승강로, 기계실 및 예비전원 등에 관한 구체적인 설치기준을 정하고 있다.

국내 피난용 승강기는 승강장을 다른 공간과 내화구조로 구획하고, 방화문과 배연 또는 제연설비를 설치하는 등의 조건을 충족해야 한다.

전원 역시 중요한 부분이다. 정전이 발생해도 피난용 승강기와 관련 설비가 작동할 수 있도록 별도의 예비전원을 확보해야 하며, 초고층 건축물은 2시간 이상, 준초고층 건축물은 1시간 이상 작동할 수 있는 용량을 갖추도록 규정하고 있다.

따라서 한국이 화재 때 모든 종류의 승강기 사용을 무조건 금지하고, 영국만 피난용 승강기를 허용하는 것은 아니다. 두 나라 모두 특정 조건을 갖춘 승강기를 피난에 활용할 수 있도록 제도를 마련하고 있다.

또한 국내의 비상용 승강기와 피난용 승강기는 주된 목적도 다르다.

비상용 승강기는 화재 시 소방대의 소화·구조활동을 지원하는 기능에 중점을 둔다. 반면 피난용 승강기는 화재 등 재난 상황에서 건물 이용자의 피난활동을 지원하기 위한 설비다.

이러한 차이를 이해하지 못하면 건물에 비상용 승강기가 설치돼 있다는 이유만으로 이용객이 화재 때 자유롭게 이용할 수 있다고 오해할 수 있다.

 

한국에 필요한 것은 피난용 승강기의 '운영'에 대한 관심

영국의 새로운 검사·시험 표준이 주목받는 이유는 피난용 승강기를 설치하는 데서 끝내지 않고 실제 화재 상황에서 어떤 기능이 작동해야 하는지를 검증하려 한다는 점이다.

한국에서도 피난용 승강기의 설치기준과 안전성 검증은 중요하게 다뤄지고 있지만, 건물별 피난계획과 연계된 실제 운영체계가 충분히 준비돼 있는지는 별도로 살펴볼 필요가 있다.

예를 들어 초고층 건물에서 화재가 발생했을 때 관리자가 피난용 승강기의 운행 상태를 어떻게 확인할 것인지, 휠체어 이용자가 어느 층의 대기공간에서 도움을 받을 것인지, 피난용 승강기를 이용할 수 없게 됐을 때 어떤 대체수단을 마련할 것인지 등이 구체적으로 정해져 있어야 한다.

또한 화재감지설비와 제어반의 통신 연동, 피난운전 모드 전환, 예비전원 공급, 승강장 안전상태 확인 등을 실제 상황에 가깝게 시험하는 것도 중요하다.

이러한 요소를 종합적으로 확인하지 않으면 법령상 필요한 시설을 갖췄더라도 실제 비상상황에서 피난시스템이 기대한 대로 작동한다고 보장하기 어렵다.

여기에는 승강기 제조사뿐 아니라 건물 소유자와 관리자, 소방 관계자, 유지관리업체의 협력이 필요하다.

특히 피난용 승강기는 일반적인 고장 수리와 달리 건물의 소방·방재시스템과 연결된 설비라는 점에서 더욱 체계적인 관리가 요구된다.

 

화재 때 엘리베이터를 타지 말라는 말은 여전히 유효하다

영국에서 새로운 기준이 발표됐다고 해서 지금부터 화재 발생 시 일반 엘리베이터를 이용해도 되는 것은 아니다.

일반 승강기는 화재와 연기, 전원 이상 등에 대응하는 피난용 설계가 적용되지 않았을 수 있다. 피난용 승강기라 하더라도 화재 위치와 건물 상태, 관리자의 운행 지시 등에 따라 이용할 수 없는 상황이 발생할 수 있다.

따라서 일반 건물 이용자는 화재 발생 시 비상방송과 소방대·건물 관리자의 안내를 따라야 하며, 승인된 피난계획에 따라 이용하도록 지정된 승강기가 아니라면 임의로 탑승해서는 안 된다.

이번 영국의 표준 발표를 단순히 '화재 때 엘리베이터 이용을 허용하는 제도'로 받아들여서는 안 되는 이유다.

그러나 장기적으로는 질문이 달라질 필요가 있다.

지금까지 화재 안전교육이 엘리베이터를 이용하지 말라는 경고에 집중했다면, 앞으로는 계단을 이용할 수 없는 사람들을 위해 어떤 조건의 승강기를 어떻게 운영할 것인가에 대해서도 더 깊이 고민해야 한다.

건물이 높아지고 이용자의 연령과 신체조건이 다양해질수록 계단만을 중심으로 설계된 대피체계에는 현실적인 한계가 생길 수밖에 없다.

영국의 새로운 표준은 이러한 문제에 대응해 승강기를 피난수단으로 활용하기 위한 안전기능을 구체적으로 검증하려는 움직임이다.

화재 때 모든 사람이 엘리베이터를 타야 한다는 이야기가 아니다. 계단을 이용하기 어려운 사람에게도 안전하게 대피할 수 있는 방법을 제공해야 한다는 이야기다.

승강기는 평상시 사람을 편리하게 이동시키는 운송수단이다. 그러나 적절한 설계와 제어, 관리체계를 갖춘다면 비상상황에서 누군가의 생명을 지키는 중요한 피난수단이 될 수도 있다.


엘모아 한 줄 요약

영국이 피난용 승강기의 검사·시험 기준을 구체화하면서 화재 시 승강기를 활용한 대피체계가 주목받고 있다. 한국 역시 관련 제도를 갖추고 있지만 실제 피난운전과 건물 방재시스템의 연계, 관리체계에 대한 지속적인 검증이 중요하다.

업계 체크포인트

  • 영국 표준: BS 8486-10:2026은 피난용 승강기의 설치 후 검사와 시험 방법을 구체화.

  • 자동 피난운전: 화재감지·경보설비와 승강기 제어반의 연동 중요성 확대.

  • 국내 제도: 피난용 승강기와 소방대용 비상용 승강기의 목적과 운행방식 구분 필요.

  • 안전관리: 화재 시 실제 운행절차, 비상전원, 피난 대기공간, 운행 중단 조건 점검 중요.

엘모아 편집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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