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외사례] “화재 때 엘리베이터 타지 마라” 바뀌나…유럽, 장애인 대피 위한 새 승강기 기준 마련

뉴스 Profile elmoa 2026-08-15 08:06 수정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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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의 이해를 돕기위해 AI로 생성한 이미지입니다

 

[엘모아=편집부] 화재가 나면 엘리베이터를 타지 말라는 것은 오랫동안 건물 안전의 상식으로 여겨져 왔다.

하지만 유럽에서는 이 상식의 예외를 제도적으로 정리하는 움직임이 본격화되고 있다. 계단을 이용하기 어려운 장애인과 거동이 불편한 사람의 대피를 위해, 일정한 조건을 갖춘 승강기를 비상 대피수단으로 활용하는 새 기준이 마련된 것이다.

유럽표준화위원회(CEN)는 올해 EN 81-76:2025를 통해 ‘장애인의 대피를 위한 승강기(Evacuation of persons with disabilities using lifts)’ 기준을 제시했다.

이 기준의 정식 명칭은 ‘승객용 및 화물겸용 승강기의 특수 적용 — 장애인의 승강기 대피’에 관한 내용으로, 비상상황에서 장애인이 승강기를 이용해 더 안전하게 대피할 수 있도록 설계·설치·운영 조건을 정리한 것이 핵심이다.

이는 단순히 “화재 때도 엘리베이터를 타라”는 의미가 아니다.

오히려 연기 차단, 전원, 통신, 대피구역, 운영모드, 지원 인력 등 추가적인 안전조건을 충족한 승강기에 한해, 기존의 획일적인 ‘금지’ 원칙을 보다 정교하게 다루겠다는 접근에 가깝다.

 

유럽 “모든 사람에게 계단은 피난로가 아니다”

EN 81-76:2025가 주목받는 이유는 분명하다.

지금까지 많은 건물의 화재대피 계획은 사실상 계단 이용을 전제로 짜여 있었다. 그러나 휠체어 이용자, 보행보조기 사용자, 고령자, 일시적 부상자 등에게 계단은 현실적인 피난수단이 아닐 수 있다.

유럽의 새 기준은 바로 이 지점을 겨냥한다.

장애인의 대피를 위한 승강기는 기존 무장애 승강기 기준과는 별도로, 비상상황에서 실제로 사용할 수 있는 추가 성능과 운영방식을 갖춰야 한다는 취지다. 단순히 장애인이 평소 이용하기 편한 승강기와, 화재 등 비상시에 대피용으로 쓸 수 있는 승강기는 다르다는 뜻이다.

영국 업계 해설에 따르면 새 기준은 자동운전 방식, 원격지원 방식, 운영자 지원 방식 등 여러 대피 시나리오를 고려하며, 건물 특성과 이용자 특성에 따라 적절한 운영형태를 선택하도록 하고 있다. 

결국 핵심은 “승강기를 쓸 것이냐, 말 것이냐”가 아니라 “어떤 승강기라면 비상시에 누구를 위해, 어떤 방식으로 사용할 수 있는가”다.

 

한국에도 피난용승강기는 있다…하지만 초점은 다르다

한국도 관련 제도가 없는 것은 아니다.

현행 건축법은 고층건축물에 설치하는 승용승강기 가운데 1대 이상을 대통령령에 따라 피난용승강기로 설치하도록 규정하고 있다.

건축법 시행령은 피난용승강기의 승강장 면적, 단일 승강로 연결, 예비전원 조명, 표지 설치 등을 요구하고 있으며, 세부 구조·설비 기준은 국토교통부령에 따르도록 하고 있다. 

또 「건축물의 피난·방화구조 등의 기준에 관한 규칙」은 피난용승강기 승강장과 승강로를 내화구조로 구획하고, 방화문·배연 또는 제연설비, 예비전원 등을 갖추도록 규정하고 있다. 

즉 한국은 이미 고층건축물에 대해 피난용승강기 제도를 두고 있다.

다만 유럽의 EN 81-76:2025가 던지는 문제의식과는 강조점이 다소 다르다.

한국 제도는 현재 고층건축물의 피난용승강기 설치 의무와 구조 기준에 초점이 맞춰져 있다면, 유럽의 새 기준은 한 걸음 더 나아가 장애인이 실제 비상상황에서 승강기를 이용해 어떻게 대피할 수 있는가라는 운영 개념을 더 구체적으로 다루고 있다는 평가가 가능하다.

 

“설치 의무”를 넘어 “실제 사용 가능성”으로 가야

한국의 피난용승강기 제도가 설치기준 중심이라면, 앞으로의 과제는 실제 운용성에 있다.

예를 들어 피난용승강기가 설치돼 있어도 장애인이나 고령자가 화재 시 그 승강기를 실제로 사용할 수 있는지, 누가 운용을 지원하는지, 대피공간과 대기공간은 충분한지, 음성·시각 정보 제공은 적절한지, 비상통신과 전원은 어느 정도까지 보장되는지 등은 별도의 운영 시나리오와 관리기준이 필요할 수 있다.

유럽 기준이 의미 있는 이유도 바로 여기에 있다.

피난용승강기를 단순히 ‘설치된 설비’로 보지 않고, 사람이 실제로 살아서 빠져나오는 과정에 투입되는 대피수단으로 다루기 시작했다는 점이다.

이는 특히 장애인 대피계획과 연결될 때 중요하다.

기존의 “화재 시 승강기 사용 금지” 문구는 일반 대중에게는 여전히 유효한 원칙일 수 있지만, 모든 이용자가 동일한 방식으로 피난할 수 없다는 점을 고려하면 보다 정교한 접근이 필요해진다.

 

한국이 배워야 할 점은 ‘규제 완화’가 아니라 ‘대피 설계의 세분화’

유럽 사례를 두고 단순히 “이제 화재 때 엘리베이터를 타도 된다”고 받아들이면 오해다.

핵심은 승강기를 무조건 허용하는 것이 아니라, 장애인을 위한 대피수단으로 안전하게 활용할 수 있는 조건을 제도화한다는 데 있다.

한국이 여기서 배울 점도 분명하다.

첫째, 피난용승강기를 건축물에 설치하는 데서 끝나지 말고 누가, 언제, 어떤 방식으로 이용하는지에 대한 운영기준을 더 세분화할 필요가 있다.

둘째, 장애인과 고령자의 대피를 일반 피난계획의 부속 문제가 아니라 독립적인 설계요소로 다뤄야 한다.

셋째, 피난용승강기와 비상용승강기, 일반 무장애 승강기의 개념과 역할을 보다 명확히 정리해 실제 건물 관리와 훈련에 반영할 필요가 있다.

넷째, 건축·승강기·소방 기준이 각각 따로 작동하기보다 실제 비상대응 시나리오를 중심으로 통합적으로 검토될 필요가 있다.

고령화가 빠르게 진행되고 있는 한국에서 이 문제는 더 이상 특수한 이용자만의 문제가 아니다.

결국 화재 대피에서 승강기를 어떻게 다룰 것인가는 단순한 기계 설비의 문제가 아니라 이동권과 생명안전의 문제이기 때문이다.


엘모아 한 줄 요약

유럽은 “화재 때 엘리베이터 금지”라는 단순 원칙을 넘어, 장애인이 실제로 대피할 수 있는 승강기 기준을 새로 만들고 있다.

업계 체크포인트

  • 유럽의 EN 81-76:2025는 장애인의 비상 대피에 승강기를 활용하기 위한 설계·설치·운영 기준을 새로 제시했다.
  • 한국도 고층건축물에 피난용승강기 설치 의무와 구조 기준을 두고 있지만, 장애인의 실제 대피 운영 시나리오까지는 더 세밀한 논의가 필요하다.
  • 앞으로 피난용승강기 정책은 설치 여부보다 실제로 누가 어떻게 사용할 수 있는지에 초점을 맞출 필요가 있다.
  • 고령화와 이동약자 증가를 고려하면 승강기 대피는 소수의 문제가 아니라 건축·소방·승강기 업계가 함께 풀어야 할 과제가 되고 있다.

엘모아 편집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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